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의 남한강 옆 강가 언덕 위에 위치한, 전체 높이 14.5m의 화강암제 칠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본 석탑은 일명 중앙탑(中央塔)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통일신라 전국토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사람이 동시에 출발하여 같은 보폭으로 걸어 만난 국토의 중앙지점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남한의 정중앙이 충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한 듯 싶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1962년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시대 석탑 중 크기가 가장 크며 7층의 지붕돌이 균형미를 갖추고 14.5m 높이로 솟아 있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세월의 흐름에 의해 기단과 몸돌에 금이 가거나 약간 깨진 부분이 있는 등 소실된 부분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본 석탑도 현전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처럼 꼭대기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이미 사라지고 없으며, 머리장식 받침 정도가 남아 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7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본 석탑은 워낙 크기도 크고 높이도 높은지라 보는 사람에게 웅장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탑 1층의 몸돌은 크게 해놨고, 위로 올라 갈수록 몸돌과 지붕돌의 크기가 차츰 줄어들어 비례감이 느껴진다.
다만, 하단부에 비해 높이가 너무 높아서 탑의 전체적인 균형감과 안정감은 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 석탑은 신라의 다른 거탑들처럼 기단부와 각 층의 몸돌을 여러 개의 돌들로 조립해서 만들었다. 하지만 6층의 몸돌부터는 여러개의 돌을 짜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단의 네 면과 각 층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형 장식을 양각으로 새겨놨다. 한편 지붕돌의 하단에는 5단으로 이루어진 역계단형 받침 장식이 있으며 지붕돌의 각 모서리는 위를 향하게 들려 있는데 이는 경쾌한 인상을 준다고 평가된다.
또한 지붕돌을 자세히 보면 각 모서리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는 풍경을 매달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이상에서 드러나는 탑의 건축방식과 장식들로 미루어봤을 때, 본 석탑의 축조연대는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의 현재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당시에는 탑이 기울고 있다고 판단하여 전면적인 해체수리를 했던 바가 있다.
이때 탑의 기단과 6층 몸돌에서 청동거울, 나무함, 은제사리함 등의 사리장엄구 유물이 발견됐으며, 이 사리장엄구 가운데 청동거울 두 점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여서, 아마도 신라때 탑을 건립한 이후 고려에 들어서 다시 한 번 사리장엄구의 봉안이 있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일제가 수리를 한 것 까지는 좋은데, 기단과 탑신부에 부재들을 어긋나게 끼워넣는 등 복원을 잘못하는 바람에 탑의 원형이 다소 변형되어 버렸다고 한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서있는 곳에는 본래 큰 사찰이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이 전무하여 더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충주는 현대의 광역시와 비슷한 통일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인 중원경일 정도로 당시 전국에서 손꼽히는 중요 도시였기 때문에, 이만한 탑을 경내에 두었고 지금은 이름이 잊혀진 이 절은 당시 중원경의 신앙을 대표하는 사원이었을 것이고 규모와 역할도 상당히 컸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대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그 자체의 형태와 아름다움이 잘 남아 있으며, 현전하는 통일신라의 가장 거대한 석탑이라는 점, 당대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면서도 신라 중원 지방의 문화를 대표할만한 작품이라는 점 등의 가치를 인정 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 유튜브 동영상/2021년 12월13일 업로드
▲ 정문옆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 공원 안내도
▲ 중앙탑 의상실
▲ 중앙탑 사진관
▲ 중앙탑에서 노래비
▲ 충주 중앙탑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시대 석탑 중 크기가 가장 크며 7층의 지붕돌이 균형미를 갖추고 14.5m 높이로 솟아 있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세월의 흐름에 의해 기단과 몸돌에 금이 가거나 약간 깨진 부분이 있는 등 소실된 부분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서기 586년)에 창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 였으나 신라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서 손국한뒤 경순왕의제일녀 였던 덕주공주가 높이 15m의 거암에 마애미륵불(보물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였으나 일생을 마친 후 산의 이름을 월악산으로 절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날 까지 이르고 있다.
덕주사는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상덕주사는 동편 계곡으로 1.5키로를 올라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은 마애미륵불 우공탑 삼층석탑 그리고 극락전과 요사터만 남아있다.
상덕주사는 1951년 12월 전화로 소실 되었으며 석축만 옛날 규모를 알려주고 있다. 하덕주사는 어는때 절이 소실 되었는지 알수 없으나 절 입구에 있는 남근석을 보면 이곳이 남아선호 신앙이 깃들었던 원시 신앙지 였음을 알수있으며 3m나 되는 탑 기단석 부도 연꽃문양 석등 와편등이 절터 였음을 증명한다.
현 대웅보전은 옛 하덕주사가 수재의 위험이 있어 1996년 성일화상이 새로이 절터를 마련 전면 5칸 측면 3칸 52평 외 5포 내 9포의 건물양식으로 창건했다.
전각안에는 법신 보신 화신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중앙이 법신불로 부처님의 진신이며 자성으로 청정법계의 진여인 실상의 법을 시현한 자성불이다.
오른편 부처님은 보신불로 과거 원력수행의 한량없는 과보로 나타난 만덕이 원만한 불신이며 화신불 또는 응화신 이라고도 하는 왼편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갖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구제하는 불신이다.(전각 내부 후면 1536불 봉안)
2.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587년(진평왕 9)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신라의 마지막 공주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머물러 절을 세우고, 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원래의 덕주사는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 앞에 있었는데, 1951년 군의 작전상 이유로 소각하였다. 창건 당시의 절을 상덕주사, 지금의 절을 하덕주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7㎞ 지점에 있었는데, 1951년 무렵 까지만 해도 고색창연한 기도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상덕주사는 1622년(광해군 15)에 중수되었음이 옛 극락전 자리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지금의 덕주사에서는 1206년(희종 2)에 조성된 금구(禁口)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덕주사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63년에 중창되었고, 1970년과 1985년에 각각 중건하였다.
덕주사에는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4기가 있으며, 우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이 절의 승려들이 건물이 협소하여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걱정할 때 어디선가 소가 나타나서 재목을 실어 날랐다. 소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마애불 밑에 서므로 그곳에다 부속건물을 지었고, 소는 재목을 모두 실어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죽은 자리에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또, 부도에는 환적당(幻寂堂)·부유당(浮遊堂)·용곡당(龍谷堂)·홍파당(洪波堂)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1985년 중창 당시에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한수면 역리에 있던 고려시대 석조 약사여래 입상을 덕주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이밖에도 덕주사 전방 약 2㎞ 지점에 있는 빈 신사 터에는 보물 제94호로 지정된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이 있으며, 덕주사 주변의 덕주계곡·송계계곡(松界溪谷)·월악계곡(月岳溪谷) 등은 풍치가 좋다.
★덕주산성/이 산성은 월악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외각을 여러 겹으로 둘러쌓은 석축 산성이다.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 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하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일명 동문주변)과 그 외곽으로 하성(제 3곽)이 있으며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등 네 겹으로 이루어진 매우 큰 규모의 석성이다.
고려 고종때 몽고의 칩입시 월악대왕의 가호와 월악신사 등과 관련한 항몽의 유적지이기도 하며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축성하고 임진왜란때에도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말기에는 명성황후와의 관련이 있는등 역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대표적인 사적이다. 최근에 남문의 문루를복원하였으며 성벽도 일부 보수하고 있다.
★미륵대원지/사적 제317호.
하늘재[寒喧嶺]·계립재[鷄立嶺]·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조성된 석굴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나 내력, 사원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쌓은 위로 목조로 세운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발굴 당시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된다.
현재,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석등, 당간지주 등 중요한 석조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태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明昌三年金堂改蓋瓦(명창삼년김당개개와)’, ‘彌勒堂(미륵당)’, ‘彌勒堂寺(미륵당사)’, ‘院主(원주)’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미륵을 모시는 사찰이자 원(院)을 겸하는 사찰이며, 1192년(고려 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된 것은 13세기이며, 이후 곧 복원되었고 조선 초기에 크게 수리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고 18세기에 들어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6년 발생한 큰 수해로 법등(法燈)이 끊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011년 7월 28일자로 ‘중원 미륵리사지’에서 ‘충주 미륵대원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해발 378m의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대원지에는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 형식의 불전이 있다. 석굴 중앙에는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의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이 부조되었다.
석굴 상부는 목조 건물로 지어 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재가 있다. 양식적으로 보면 고려 초인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형이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사원은 북향을 하고 있으며, 사원 전체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1977·1978·1982년 3차례에 걸쳐 시행된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여러 명문 기와와 건물지 발굴을 통해 사찰의 성격이 밝혀졌다.
특히 ‘미륵대원’이라고 한 것은 동쪽에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인데, 말을 묶어 둔 마방시설, 여행자 숙소 등 역원의 건물터도 함께 발굴되어 사찰과 역원의 기능을 합친 고려 초기의 중요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미륵대원지는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의 아달라니질금(阿達羅尼叱今)조에 “계립령금미륵대원동령시야(鷄立嶺今彌勒大院東嶺是也)”의 미륵대원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의 존폐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시기인 고려 충렬왕대까지는 존속되고 있었던 듯하다.
▲ 유튜브 영상2021년 12월11일 업로드
▲ 덕주사 개념도
▲ 덕주사 입구로 걸어 들어갑니다. 차를 가지고 덕주사로 갈수도 있습니다. 주차장도 비교적 넓습니다
▲ 우측 덕주사 자연관찰로로 갑니다
▲ 좌측계곡에 수경대가 있습니다
▲ 자연관찰로가 끝나고 도로로 나옵니다
▲ 덕주산성 동문과 그옆계곡이 학소대 입니다
▲ 덕주산성
▲ 덕주산성의 안내문
▲ 뒤에서 본 덕주산성 동문
▲ 학소대(우)와 용마산(좌)
▲ 약 1키로를 걸어 덕주사에 도착했습니다
▲ 덕주사 안내문
▲ 덕주사 범종
▲ 덕주상에서 잘보이는 용마산(말뫼산)
▲ 덕주사 대웅보전
▲ 남근석(월악산이 음기가 강한 산이라 그 기운을 누루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남근석을 설치한것으로 추정
▲ 남근석에 대한 안내문
▲ 대불정주범자비(인도의 옛 문자인 범자가 새겨진 비석이다)
▲ 덕주사 산신각과 안내문
▲ 덕주사 석조약사여래입상
▲ 덕주사 바로 옆에는 월악산 덕주탐방지원센타가 있습니다. 월악산 영봉을 등산하는 시발점입니다. 영봉 4.9키로 마애불 1.6키로 입니다
▲ 월악산 영봉석과 월악산에 대한 안내비석
▲ 바위 위에서 자라는 느티나무(주차장)
▲ 지금의 덕주사에서 약 1.6키로 지점에 있는 덕주사마애불/(보물 406호) 동국여지승람이나 전설에 따르면 마의태자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곳에 들어왔다가 자기의 형상을 마애불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 이제 하산길로 갑니다. 하산길에 바라본 덕주사 동문과 덕주산성
▲ 덕주사 입구 도로가에 있는 덕주골 노래비
▲ 덕주사 입구에서 도로로 400여미터 가면 덕주산성 남문이 나옵니다
▲ 덕주산성 남문
★덕주산성/이 산성은 월악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외각을 여러 겹으로 둘러쌓은 석축 산성이다.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 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하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일명 동문주변)과 그 외곽으로 하성(제 3곽)이 있으며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등 네 겹으로 이루어진 매우 큰 규모의 석성이다.
고려 고종때 몽고의 칩입시 월악대왕의 가호와 월악신사 등과 관련한 항몽의 유적지이기도 하며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축성하고 임진왜란때에도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말기에는 명성황후와의 관련이 있는등 역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대표적인 사적이다. 최근에 남문의 문루를복원하였으며 성벽도 일부 보수하고 있다.
▲ 덕주산성 남문에 대한 안내문
▲ 남문앞 계곡가에 있는 망폭대와 안내문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덕주사에서 직선거리로 약 4.5키로 떨어진 충주 미륵대원지로 왔습니다
▲충주 미륵대원지 개념도
▲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좌측의 미륵세계사 방향으로 갑니다
▲ 미륵세계사
▲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2022년까지 공사중입니다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 96호)의 안내문
▲ 공사중이라 석조여래입상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 볼수있습니다.
▲ 미륵대원지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
▲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 미륵대원지 원터
▲ 미륵대원지 당간지주
▲ 조금더 자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위의 유튜브 동영상을 참고하세요. 본인이 직접 제작한 영상입니다.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 악성(樂聖)으로 불린 우륵(于勒)은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했다. 진흥왕은 우륵을 반기며 국원(충주)에 거주하게 했다. 그리고 신라의 청년인 법지, 계곡, 만덕을 선발해 악(樂)을 배우게 하고 우륵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런 연유로 우륵은 만년에 멸망한 가야국을 떠나 충주에 우거했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우륵은 이곳의 풍치를 탐미하여 산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다. 이곳이 바로 우륵이 금(琴)을 탄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탄금대(彈琴臺)’다.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의 미묘한 소리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고 곧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탄금대 주변에는 지금도 가야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칠곡리(칠금동), 금뇌리(금능리), 청금리(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모두 가야금과 관련된 것이다.
탄금대는 충주시 근처에 있는 대문산(108m)의 정상을 지칭한다. 산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는데 강변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도는 탄금대는 남한강과 너른 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강줄기의 모습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벼랑에 위치한 열두대에서 가장 잘 보인다. 정상부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탄금정이 있고, 동쪽으로는 계명산과 남산이 솟아 있으며 아래로는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참혹한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도순변사였던 신립(申砬)은 8,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에 맞서 탄금대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는 배수진을 치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결국 패하고 말았다. 신립은 이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투신하여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탄금대 북쪽 절벽에는 열두대가 위치하고 있다. 열두대의 지명에 관한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바위의 층계가 12개이기 때문에 열두대라 하기도 하고, 절벽 아래 물이 12번 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교전 중 달구어진 화살을 식히느라 12번을 오르내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열두대 아래는 깊은 소가 있는데 이를 양진명소라 한다. 이곳에 뱃길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선주, 선박 상인들은 양진명소에서 안전과 번영을 빌었다고 한다.
탄금대에는 전쟁과 관련된 또 다른 유적이 있다. 정상 주위에 남아 있는 오래된 토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토성은 4세기 중후반에 탄금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던 철을 생산하는 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백제와 관련된 유물만이 출토되어 고구려나 신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에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탄금대는 충주의 시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명소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일반인들의 탐방은 물론 도시공원으로도 이용되어 왔다. 그래서 탄금대에는 공원 시설이 다양하게 조성되어 있다.
또한 전쟁의 역사성과 관련된 궁도장을 비롯해 우륵의 가야금과 관련된 공원 시설, 충혼탑, 야외음악당, 특히 공원의 효과적인 활용을 위한 공원도로도 많이 개설되어 있다.
오랫동안 도시공원으로 이용되었던 탄금대는 뒤늦게 국가지정 명승으로 그 장소적 가치가 인정되었다. 명승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시민들의 공원으로서도 잘 활용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충주시의 명소인 탄금대는 나라를 잃고 정복국의 신민이 되어 변방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악성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한의 울림으로 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또한 문경새재를 넘어온 왜군에 맞서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장수 신립의 함성이 메아리쳐 우렁차게 들려오는 듯하다. 지난날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했던 명승 탄금대는 국가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인 경승지다.
▲ 유튜브 영상/2021년 12월9일 업로드
▲ 자연과 인간사이
▲ 충혼탑(광복 이후에 순국한 충주 중원지역의 애국 순국 선열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5년에 건설. 현재 1930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음. 매월 6월6일 현충일에 추도식이 열림.
1/충북 제천시에서 공사비 85억원을 들여 2021년 10월 22일 완공한 옥순봉 출렁다리는 길이 222미터에 폭이 1.5미터의 무주탑 출렁다리로 성인 1286명이 동시에 건널수 있는 하중으로 건설되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약 400미터의 옥순봉 생태 탐방로 덱크길이 연결된다. 현재는 이 출렁다리로 옥순봉 등산이 불가능하지만 차후 등산로가 개설되면 등산과 관광이 동시에 가능해져 충주호의 전망과 옥순봉 구담봉의 절경이 합쳐져 환상적이 관광명소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2/충북 제천시 청풍호를 가로 질러 옥순봉을 연결하는 '제천 옥순봉 출렁다리'가 22일 개통식을 열었다.이날 행사에는 이상천 제천시장, 배동만 제천시의회 의장, 시의원, 엄태영 국회의원과 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해 출렁다리 개통을 축하했다.
개장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당분간 휴일 없이 운영할 계획이며, 이용요금은 내년 3월까지는 무료, 그해 4월1일부터는 요금 3,000원을 받고 '제천화폐 모아'로 2,000원을 환급할 예정이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단절된 수산면 괴곡리 자연마을 옛길 복원을 통한 주민들의 오랜 숙원을 해소하고 명승 제48호 옥순봉을 연결하는 명품탐방로 조성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추진된 '제천 옥순봉 출렁다리'는, 2015년 중부내륙광역관광개발사업 기본계획에 따라 사업을 시작, 작년 6월 착수하여 1년 4개월여 만에 그 모습을 선보이게 됐다.
이 시설은 국도비를 포함한 총 85억 원의 예산을 들여 조성한 길이 222m, 폭 1.5m로 조성되는 무주탑방식의 출렁다리로, 탐방로 408m, 관광편익시설(화장실,소매점,매포소 등), 주차장과 주차장 연결데크 등과 함께 조성됐다.
시 관계자는 "청풍호일원의 압도적 경관과 함께 옥순봉을 가장 가까이에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옥순봉 출렁다리는, 지역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부각될 것으로 확신한다"며, "지속적인 상품성 보강을 통해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시 전지역에 관광인프라를 탄탄히 구축해 제천 관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유튜브 동영상/2021년 12월5일 업로드
▲ 옥순봉 출렁다리 개념도
▲ 옥순봉 출렁다리 주차장에 주차하니 출렁다리 입구가 보입니다
▲ 네비에 옥순봉 출렁다리를 치면 쉽게 오실수 있습니다. 주차료는 없습니다
▲ 입구를 지나 출렁다리로 갑니다
▲ 옥순봉과 출렁다리가 보입니다. 청풍호를 가로지릅니다
▲ 출렁다리 입구에 있는 옥순대교
▲ 출렁다리로 들어섭니다
▲ 좌측으로 보이는 옥순봉(해발 286미터) /아직 출렁다리를 건너 올라가는 등산로가 정식 개설 되지 않아서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