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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하는 락(메탈)발라드 139/

백두산-IN MY LIFE

 

결성

1970년대 후반부터 미8군 부대를 중심으로 솔로 활동 및 '라스트 찬스', '사계절',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유현상과 베이시스트 김창식, 드러머 한춘근 등에 의해 1983년에 결성되었으나 당시 '솔로몬'이란 밴드의 멤버였던 이태원의 천재적인 속주 기타리스트 김도균이 서라벌 레코드사 사장의 권유로 1985년 말 밴드에 가입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밴드로서의 라인업을 갖추게 된다.

전성기

1986년 6월 백두산의 데뷔 앨범 《Too Fast! Too Loud! Too Heavy!》가 발매된다. '어둠 속에서', '말할걸', '뛰어', '웅비' 등의 곡들은 향후 백두산이 음악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준 곡들이었다. 베이시스트가 김주현으로 바뀐 뒤, 보컬 유현상이 샤우팅 창법으로 선회하여 이듬해에 발매한 2집 《King Of Rock'N Roll》은 헤비메탈 밴드로서 완벽하게 변모한 백두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 받고 있으며 국내 헤비메탈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메탈명반으로 인정되고 있다. 일본의 'BURRN!'이라는 외국 잡지에 소개된 적도 있었으며 백두산이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Main Character (주연배우)'를 제외한 모든 곡의 가사들이 영어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나 당시 영어 가사에 대한 탄압이 너무 심해 정작 방송출연을 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엄청나 백두산은 무려 500회가 넘는 순회공연을 가졌다.

해체와 침체기

2집 발매 직후 1987년, 부활의 김태원이 대마초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락씬이 초토화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대다수 락계 인사들이 무차별 체포되자, 해외에서는 인정을 받는데도 정작 국내에서는 음악의 가사, 무대 퍼포먼스에 대한 심의가 너무 심해 자신들의 곡이 방송 불가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정신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씩 해체되는데 백두산 역시 국내의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해체하기에 이른다. 김도균은 이러한 환경을 정신적으로 이기지 못해 탈퇴,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고, 유현상은 백두산을 해체, 백두산 프로덕션을 설립, 가수 이지연을 데뷔시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갑작스런 이지연의 결혼으로 유현상은 회사마저 문을 닫게 되고, 최윤희와 결혼 후에 트로트 가수로서 활동하게 된다.

김도균은 실력을 갈고 닦기 위해 《Rock In Korea》에 참여, 1989년에 임재범과 함께 영국으로 떠난 뒤 슈퍼밴드 '아시아나'를 결성했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했고, 1993년 베이시스트 '김창식', 드러머 '최경섭'과 함께 다시 백두산을 재결성한다. 3집 《너를 기다리네》를 발매, 김도균이 직접 리드 보컬까지 함께 맡은 이 앨범은 이전의 백두산의 앨범들과 달리 하드락 성향을 띈 앨범이었으며 '너를 기다리네'와 같은 발라드 곡이 인기를 끌었으나 대마초 사건에 다시 연루되면서 불명예스러운 해체를 맞이한다.

재결성

2008년에는 원년 멤버로 재결성해 동두천 락 페스티발에서 재결합 공연을 가졌으며, 2009년에는 4번째 정규 음반 《Return Of The King》을 발표했다. 2011년 5번째 정규 음반 《Rush To The World》가 발매되었다. 2집처럼 두 곡을 제외한 모든 곡들의 가사가 영어로만 작사되었다. 재결성 후에 드러머가 '미르', '사혼', '피어 잇 소울'에서 활동하던 박찬으로 바뀌었다. 또한 베이시스트도 지병인 천식으로 탈퇴한 기존의 멤버 김창식 대신 김경호 밴드와 에메랄드 캐슬, N.EX.T 등을 거친 경호진을 새롭게 영입했다. 김도균과 함께 3집을 같이 작업했을 때 연이 닿아서 함께 합류한 것으로 보이지만 경호진은 탈퇴하였고 김창식이 새롭게 복귀하였다.

백두산의 리더이자 보컬 유현상/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현, 동두천시 탑동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기도 양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71년에 록 밴드 Last Chance의 리드 싱어로 활동하다가 1976년 재즈 록 밴드 사계절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고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사병 복무 이후, 1981년에 솔로 가수로 전향하였으며, 1982년 록 밴드 사랑과 평화의 보컬리스트로 잠시 활동한 후 1986년 헤비 메탈 밴드 백두산을 결성하고 보컬리스트로 활동하였다.

1988년 백두산 프로덕션을 설립한 후 가수 이지연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프로듀서로 활동하였고, 1991년에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여 앨범 《여자야》를 발표한 후 솔로 활동을 하다가 2008년에 백두산을 재결성하여 8월 17일 《동두천 록 페스티벌》에서 컴백 공연을 펼쳤다.

 

백두산/ In My Life

In My Life 는 2008년 원년멤버로 재결성한후 2009년에 발표한 제 4집앨범 Return Of The King에 5번째로 수록한 곡이다. 보컬 유현상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만든곡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고난을 이겨낼수 있다는 희망을 담은 곡이다. 도입부의 잔잔한 기타멜로디에서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장엄하고 파워풀한 사운드는 이곡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짧지만 큰 획을 남겼던 헤비락계의 큰 형님 같은 존재로서 3장의 앨범을 남기며 국내 헤비메탈 계의 전설로 기억되온 백두산!

통산 4집 앨범 'Return Of The King' 은 단순하게 쏟아져 나오는 흔하디 흔한 대중가요가 아니다. 이것은 백두산의 삶이자 피이며, 인생이 담겨져 있는 대한민국 록계의 값진 기록이자 역사가 될 것이다!

천재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대중 가수를 발굴해 내던 기획자로 성공, 이후 다양한 음악여정을 성공적으로 거닐었던 다재 다능한 유현상(보컬) 그리고 타미 앨드리지를 방불케 하던 드러머 한춘근 최근 트랜드까지 섭렵하며 백두산에 젊은 피를 넣어준 노장 김창식(베이스)의 화려한 멤버로 구성되어 전성기 시절 못지 않은 변함없는 사운드로 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얻고 있다.

 

 

 

백두산/ In My Life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왔나

나는 지금 무엇하고 있나

안개속에 길을잃었고

비바람에 방황 했었지

그때는 예전 일이야

하지만 나는 푸른꿈 안았지

꿈을 찾아 뛰고 또 뛰었지

나는 할 수 있다

큰 소리쳤어

다신 안쓰러져

다신 울지 않아

웃었지

얼마 전 일이야

자,친구야 두손을 잡고

잡은 손을 하늘높이 올려

그리고 큰소리 치자

우리 모두 이룰 수가 있어

친구야 두손을 잡고

잡은 손을 하늘높이 올려

그리고 큰소리 치자

우리 모두 이룰 수가 있어

Now I under stand Who I am and where I've ben

Now I under stand love is meant to share with every one

And Now I sing for the time

Left in my life

And Now I love for the time

Left in my life

Left in my life

Now understand

In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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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MAYA 진달래꽃

 

 

 

 

마야는 본명 김영숙으로 대한민국의 록가수로 1075년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대표곡으로는 데뷔곡인 진달래꽃, 나를 외치다, 쿨하게, 위풍당당 등이 있다. 파워풀한 노래의 인기가 많다.

록커라 여성 가수중에서도 성량이 좋다. 이는 라이브 무대에서 더 빛난다.

 

2010년 전후의 곡으로 전성기를 누린 가수. 2009년 11월에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샘플링한 노래인 '위풍당당'을 들고 나왔는데, 코갤러들한테 아따맘마 주제가를 부르고 있다고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필 아따맘마의 한국어 로컬 애니의 엔딩도 위풍당당 행진곡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클래식이나 시가 등 고전으로 평가받는 예술을 락으로 재구현한 가수라 평가할 수 있다.

 

 

 

 

 

 

 

 

2003년에 이 시의 내용 그대로 발표된 가수 마야의 노래로 만들어진 곡으로, 십이지마냥 리듬을 타야 외우는 사람도 간혹 있다. 부작용으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암송해 보라고 하면 잘 외우다 말고 뜬금없이 마야의 진달래꽃에만 나오는 가사를 외우는 사람도 나온다. 뮤직비디오는 쿠바를 배경으로 했다. 또한 걸프전때의 이라크 모습도 나온다.

 

2003년에 가수 마야는 이 슬픈 시를 아주 강한 록음악으로 바꾸는 발상의 전환을 해서

꽤 인기를 모았습니다.

 

지금 40대 후반 50대 정도 되시는 분들은 이 멜로디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이러는 분들 계실건데요

 

사실 이 노래는 오래전 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진달래 송 이렇게 불리던 구전가요였습니다.

 

특히, 70~80년대 대학생들이 응원가로 시위현장에서 목청껏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를 만든 작곡가가 누구나 쉽게 따라 불를 수 있는 노래가 없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대학시절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불렀던 바로 진달래송이 떠올라 새롭게 편곡을 하여

곡을 만들었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2015년 11월 19일 2015 프리미어 12 준결승전에서 9회 일본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이룬 뒤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중계를 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마야(MAYA )진달래꽃 가사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보내 드리오리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눈물 흘리오리다

 

날 떠나 행복한지 이젠 그대아닌지

그대 바라보며 살아온 내가

그녀 뒤에 가렸는지

사랑 그 아픔이 너무 커

숨을 쉴수가 없어

그대 행복하길 빌어 줄께요

내 영혼으로 빌어 줄께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 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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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비틀즈 키보이스

키보이스 2기의 명곡  해변으로가요 

 

 

                                   ★키보이스 2기 멤버들

 

 

 

                   

 

 

 

이곡은 키보이스의 창작곡이 아니고 일본밴드 일본밴드 astro jet 가 1969년 서울 광화문의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출전 당시의 출전곡이었다. 

 

일본곡명은 "고히비토타쓰노 하마베"이다. 이를 편곡해 키보이스 2기가 리메이크 한곡이다. 

 

 

제목 그대로 여름 노래 가운데 하나. 일본 곡을 번안한 노래로, 키보이스가 1970년에 불러 유명해졌으며, 작사 및 작곡가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아 논란이 있었다. 대법원에서는 이 노래의 저작권자가 재일교포 이철 씨라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프로야구팀 치바 롯데 마린즈의 후쿠우라 카즈야의 응원가가 이 노래였으나, 2010년 이후로 응원단이 전면 물갈이되면서 지금의 응원가로 바뀌었다.

 

키보이스

1963∼1964년 경 미8군 무대와 일반 무대를 오가면서 활동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활동 초기 ‘한국의 비틀스’라는 별명에서 보듯 당시 세계적 선풍을 일으키던 비틀스의 이미지와 컨셉을 차용하여 만들어졌다.

 

결성 당시 멤버는 차중락(보컬), 차도균(베이스 기타), 윤항기(드럼),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이고 통칭 ‘1기 키보이스’라고 불린다. 였다. 『한국의 비틀스 Key Boys』(1964)는 애드 훠의 데뷔 앨범과 더불어 한국 록 음반의 효시로 꼽힌다.

 

1969년에는 원년 멤버가 모두 탈퇴하고 장영(베이스 기타), 박명수(기타), 조영조(기타)를 주축으로 여러 멤버가 들고 났다. 통칭 ‘2기 키보이스’라고 부르고 6인조 혹은 7인조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원년 멤버 가운데 차중락과 차도균은 솔로 가수로, 윤항기와 김홍탁은 각각 키 브라더스와 히 화이브/히 식스의 리더로 성공적 경력을 지속했다.

1기 키보이스는 비틀스를 비롯한 1960년대 영미 팝의 번안곡 중심으로 활동했고, 직업적 작곡가의 창작곡을 일부 수록했다. 2기 키보이스 때인 1969년 5월「제1회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최고상’과 ‘연주상’을 차지하면서 인기 그룹으로 부상했고, 그 후「바닷가의 추억」, 「해변으로 가요」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1971년을 마지막으로 음반을 발표하지 않았다. 원년 멤버인 김홍탁, 윤항기, 차도균 등은 가수, 연주인, 제작자로 음악 관련 활동을 계속했다.

 

자작곡을 만들어 연주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후대의 평가가 인색한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한국에 록 음악을 뿌리내리고 대중화하는데 공헌을 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변으로 가요 가사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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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 그것만이 내세상(1985年)

 

 

 

 

1983년 보컬 전인권, 키보드 허성욱 듀오에 베이스 최성원이 합류하여 결성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록밴드로 손꼽힌다. 1984년 경 최성원이 잠시 빠지고 기타 조덕환이 가입하였고, 얼마 안 가 다시 최성원이 합류하여 이 4명으로 1집 앨범을 냈다. 이때 만든 1집 앨범 행진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힐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국 대중음악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며, 외국의 록 음악을 한국 특유의 정서에 맞춰 잘 소화한 혁명적인 음악을 보여주고 뮤지션 세대교체, 창작, 세션, 녹음 모든 부분에서 분기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 앨범이 발표된 후 암약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하나 둘 씩 오버그라운드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며 가요 시장에서 주류 히트곡과 작가주의 앨범이 공존하는, 소위 말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가진다.

한 마디로 한국 대중음악은 이 앨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봐도 된다.

 

1985년에는 1집에 이미 세션으로 참여하고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의 멤버들인 드럼 주찬권과 기타 최구희도 정식 멤버로 가담하여 2집을 발매했다. 하지만 2집의 부진 후 해체하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 전인권 외에 모든 멤버를 교체하여 들국화 3을 냈지만, 평가도 좋지 않았고 주목도 받지 못했다.

 

이후 2012년 드디어 재결성을 했지만, 2013년 10월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해산 상태에 이르렀다. 2013년 12월 신곡+셀프 커버 형식의 4집 '들국화'를 발매했다.

 

 

그것만이 내세상은 한국의 록밴드 들국화의 1집 앨범의 수록곡. "행진"과 더불어 들국화 1집의 대표곡이자 들국화의 전설적 명곡으로 꼽히는 곡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긴 곡으로 당시 들국화 핵심 멤버이자 베이시스트였던 최성원이 군대 있을 당시 혹은 제대 직후에 만든 곡이라고 한다.

 

지금 들어도 감정적인 깊이 면에서나 곡의 완성도 면에서 70년대나 80년대 영미권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곡들과 견주어도 크게 손색이 없다. 전인권의 거칠면서도 호소력 짙은 보컬에 최구희와 허성욱의 감각적인 연주가 결합되어서 만들어진 곡이다. 곡의 가사는 전체적으로 세상과의 충돌과 친구로 보이는 지인과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이루려는 화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된다.

 

이 노래는 당시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곡이기도 하다. 어떠한 정치적인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이 곡이 전두환 독재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새로운 시대를 바라던 청년들의 감성에게 던진 돌직구로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당시 운동권에서 이 노래를 들먹였다는 이유로 금지곡 지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발매하고 3년 정도 후부터 방송에서 만날 수 있었다. 들국화의 명곡으로 이후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한 곡이며 물론 음역대가 높아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곡인데다가, 곡 자체의 난도도 상당하기 때문에 할 때마다 원곡만 못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 그 중에 권인하의 버전이 가장 원곡에 근접했다는 평을 받는다.

 

 

 

 

 

 

 

 

 

 

들국화 - 그것만이 내세상 가사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후횐 없어 찾아 헤맨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네 세상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 또한 너에게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혼자 그렇게 그 길에 남았나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후횐 없어 가꿔왔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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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에서 본 거리 - 다섯손가락

 

 
이층에서 본 거리는 1987년 다섯손가락의 3번째 앨범으로 포장되어 발표한 3집 앨범 수록곡이지만 사실상 밴드는 해체되었고 이노래의 작사 작곡가인 이두헌의 솔로 앨범격에 수록한 곡이다. 
 
1980년대 들어 부활, 시나위, 들국화 등 하드록 그룹이 대세이던 시절, 차분한 포크록을 들고 나타난 대학생 밴드 ‘다섯손가락’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보컬 임형순(51), 기타 이두헌(51), 키보드 최태완(50)을 주축으로 1985년 데뷔한 다섯손가락이 데뷔 30년 만에 다시 뭉친다.
 
오는 12월 26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앰프라이브클럽에서 1987년 그룹 해체 이후 첫 단독콘서트를 갖는다. 지난 12월 4일 경기도 일산 현대백화점에서 임형순·이두헌씨를 만났다. 마침 이두헌씨가 그곳에서 공연이 있었다. 이번 공연에는 오리지널 멤버 중에서 두 사람을 비롯해 최태원씨가 함께한다. 머리 희끗한 50대가 되어 30년 만에 뭉친 다섯손가락의 근황과 추억을 들어봤다.
   
   다섯손가락이 그룹으로 활동했던 기간은 3년이 채 안 됐다. 그룹 앨범은 1집과 2집이라고 할 수 있다. 멤버들이 하나둘 군 입대를 하고 임형순이 솔로로 전향을 하면서 그룹은 사실상 해체됐다.
 
이두헌 혼자 다섯손가락 이름으로 3, 4집을 냈지만 솔로음반이나 다름없었다.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다섯손가락은 198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을 대변했다. 2집에 실렸던 노래 ‘풍선’은 2006년 동방신기의 리메이크로 또다시 전국에 울려 퍼졌고 요즘에도 수요일만 되면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온다.
   
   무대에서 ‘다섯손가락’은 사라졌지만 멤버들은 여전히 음악 속에서 살고 있었다. 임형순씨는 두원공대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후배들을 키우고 있고, 최태완씨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활약하면서 역시 두원공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있다.
 
이두헌씨는 경희대 국제교육원 겸임교수로 있으면서 자신의 밴드와 함께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비틀스론’ 강좌를 개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름 앞에는 ‘다섯손가락’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다섯손가락 - 이층에서 본 거리 가사

 

수녀가 지나가는 그 길가에서
어릴적 내 친구는 외면을 하고
길거리 약국에서 담배를 팔고


세상은 평화롭게 갈길을 가고
분주히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온종일 구경하는 아이도 잇고
시간이 숨을 쉬는 그길가에는
낯설은 그리움이 나를 감싸네


이층에서 본 거리
평온한 거리였어


이층에서 본 거리
안개만 자욱 했어. 으예


해묵은 습관처럼
아침이 오고
누군가 올것같은


아침이 오고
아무도 찾아오지않는 이유로


하루는 나른하게 흘러만 가고
해묵은 그리움이 다시 떠오네


이층에서 본 거리
평온한 거리였어
이층에서 본거리


안개만 자욱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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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민 - 멀어져간 사람아

 

 

 

대한민국의 가수로, 1993년 데뷔. 대표곡으로는 '멀어져 간 사람아' '무기여 잘 있거라', '무기라도 됐으면', '하나의 사랑', '상실', '해바라기', '서른이면', '울지마요', '눈물잔', '다짐', '애원' ,'한사람', '비원', '지중해', '청바지 아가씨' '헬스클럽 아가씨', '너에게 가는 길 Part 1' '니가 그리운 날엔', '지상에서 영원으로', '한 사람을 위한 노래', '내가 사는 이유', '사랑한 자의 부탁' 등으로, 상당히 많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기부 연예인으로 대표되는 김장훈과 맞먹을 만큼 기부액이 엄청나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부한 액수만 40억 원에 이르며, 그밖에 갖은 행사 및 공연에서도 수익금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무료 출연을 자청하는 등 가수 생활 20여 년 동안 조용하게 기부를 하는 연예인(진정한 기부왕)이다. 성격도 좋아서 동료 연예인 등 지인들이 굉장히 좋게 평하는 가수기도 하다. 대선배 조영남은 박상민을 "어이없을 정도로 착한 가수다"라고 평했다.

 

박상민은 1964년생으로 본명은 박덕만이다. 그는 평택 한광고 재학시절 학교밴드 롤링스톤즈를 결성하고 활동을 하면서 밴드활동을 시작했다. 홍익대로 진학하고 오랜기간 동안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무명생활을 하던 그는 1993년 1집앨범 Start를 내고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1994년 지구레코드사에서 발표한 2집앨범은 10곡을 수록했는데 박상민은 재즈 록 발라드등 다양한 곡들을 특유의 샤우팅 창법으로 소화했다. 2집앨범의 수록곡중 멀어져간 사람아는 신대철이 결성한 3인조 밴드 자유가 발표한 곡인데 박상민이 편곡을 해서 특유의 창법으로 호소력 있게 불러 빅힛트를 기록해 스타덤에 오르게 되고 그의 대표곡이 된다. 이앨범은 40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박상민은 실력파 가수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락과 소울이 섞인 듯한 창법과 풍부한 성량이 어우러져 정말 노래를 맛깔나게 부르는 가수. 주로 락, 컨트리 계열에 특화되었다. 히트곡도 보통 해당 장르에 속한다.

 

 

 

 

 

 

 

 

가사

내게 사랑한다는 말하고
멀어져간 사람아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는 그대여
 
내게 안녕이란 말하고
멀어져간 사람아
그대여 나만 홀로
외로이 서 있네
 
머나먼 저 바다로 가면
찾을 수 있나
머나먼 저 하늘 위에는
있지 않을까
 
어두운 저 창문 밖으로
누군가 있지 않나
쳐다봐도 가로등만
외로이 서 있네
 
머나먼 저 바다로 가면
찾을 수 있나
머나먼 저 하늘 위에는
있지 않을까
 
멀리 떠나버린 그대여
저 하늘위에 사랑이
있다고 말하지 마오
멀리 떠나버렸네
 
머나먼 저 바다로 가면
찾을 수 있나
머나먼 저 하늘 위에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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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손가락 - 새벽기차

 

 
1985년 발매된 다섯손가락의 데뷔 앨범.
다섯손가락이 1984년 KBS 젊음의 행진에 나와 합격한 후 발매한 첫 정규 앨범이며, 발매 당시 멤버는 임형순(보컬), 이두헌(보컬, 기타), 박강영(드럼), 최태완(키보드, 피아노), 이우빈(베이스).
1985년 봄에 데뷔 앨범을 발표한 다섯손가락은 여러 대학의 학생이 모인 캠퍼스 밴드였지만 그 실력이 예사롭지않았다. ​ 기타를 치면서 대부분의 곡을 만든 이두헌(동국대 경제학과)이 밴드의 실질적인 리더였고, 새벽기차를 부른 임형순(홍익대 영문과)의 보컬은 경쟁력이 있었다. ​ 

다섯손가락의 데뷔 앨범은 부활, 시나위, 백두산 등의 밴드들로 대표되는 80년대 록 음악계의 주류 흐름이었던 하드 록/헤비 메탈이 아닌, 소프트 록/록 발라드에 가까운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악과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사,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특유의 분위기로 록 팬들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앨범 판매량은 대략 45만 장 정도이며, 1986년 1월 발표한 조사에서 MBC와 KBS 라디오 방송 횟수 1위와 음반 판매량 5위를 기록하였으며, KBS 가요대상을 수상하였다.
록 음악의 열기와 실험성 대신 서정성과 감성을 내세운 다섯손가락의 데뷔 앨범은 80년대 그룹사운드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였으며 공중파에서도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여러모로 대중성과 음악성이 조화를 이룬 명반이라 할 수 있겠다. 2004년 서울음반에서 재발매 하였다.
 
새벽기차는 1985년 다섯손가락의 1집 데뷰앨범에 수록한 곡이다. 피아노 인트로와 임형순의 고음이 매력적인 '새벽기차'는 국내 락밴드에서는 듣기 힘들었던 락 발라드였다.

 

 
 
 
 
그룹 ‘다섯손가락’의 1집 앨범(1985)에 수록된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은 당시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어냈다. 생전 꽃집이라고는 가본 적 없던 남자들이 장미꽃을 사느라 꽃집 앞에 줄을 섰다. 덕분에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다섯손가락’의 멤버 이두헌은 화훼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역시 1집에 실린 ‘새벽기차’도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다. ‘희미한 어둠을 뚫고 떠나는 새벽기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것이 청춘의 특권인 양 기타를 둘러메고 새벽기차 여행을 떠나는 것이 또 하나의 유행이었다.
   
   1980년대 들어 부활, 시나위, 들국화 등 하드록 그룹이 대세이던 시절, 차분한 포크록을 들고 나타난 대학생 밴드 ‘다섯손가락’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보컬 임형순(51), 기타 이두헌(51), 키보드 최태완(50)을 주축으로 1985년 데뷔한 다섯손가락이 데뷔 30년 만에 다시 뭉친다.
 
오는 12월 26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앰프라이브클럽에서 1987년 그룹 해체 이후 첫 단독콘서트를 갖는다. 지난 12월 4일 경기도 일산 현대백화점에서 임형순·이두헌씨를 만났다. 마침 이두헌씨가 그곳에서 공연이 있었다. 이번 공연에는 오리지널 멤버 중에서 두 사람을 비롯해 최태원씨가 함께한다. 머리 희끗한 50대가 되어 30년 만에 뭉친 다섯손가락의 근황과 추억을 들어봤다.
   
   다섯손가락이 그룹으로 활동했던 기간은 3년이 채 안 됐다. 그룹 앨범은 1집과 2집이라고 할 수 있다. 멤버들이 하나둘 군 입대를 하고 임형순이 솔로로 전향을 하면서 그룹은 사실상 해체됐다.
 
이두헌 혼자 다섯손가락 이름으로 3, 4집을 냈지만 솔로음반이나 다름없었다.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다섯손가락은 198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을 대변했다. 2집에 실렸던 노래 ‘풍선’은 2006년 동방신기의 리메이크로 또다시 전국에 울려 퍼졌고 요즘에도 수요일만 되면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온다.
   
   무대에서 ‘다섯손가락’은 사라졌지만 멤버들은 여전히 음악 속에서 살고 있었다. 임형순씨는 두원공대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후배들을 키우고 있고, 최태완씨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활약하면서 역시 두원공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있다.
 
이두헌씨는 경희대 국제교육원 겸임교수로 있으면서 자신의 밴드와 함께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비틀스론’ 강좌를 개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름 앞에는 ‘다섯손가락’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다섯손가락 - 새벽기차 가사

해지고 어둔 거리를 나홀로 걸어가며는

눈물처럼 젖어드는 슬픈 이별이

떠나간 그대 모습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

애처롭게 웃음짓는데

 

그 지나치는 시간 속에 우연히

스쳐가듯 만났던 그댄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네

허전함에 무너진 가슴

 

희미한 어둠을 뚫고 떠나는 새벽기차는

허물어진 내 마음을 함께 실었네

 

낯설은 거리에 내려 또다시 외로워지는

알 수 없는 내 마음이여

 

그 지나치는 시간 속에 우연히

스쳐가듯 만났던 그댄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네

허전함에 무너진 가슴

 

희미한 어둠을 뚫고 떠나는 새벽기차는

허물어진 내 마음을 함께 실었네

 

낯설은 거리에 내려 또다시 외로워지는

알 수 없는 내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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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사랑할수록 

 

1993년에 발표한 부활의 3집 '기억상실'의 타이틀 곡. 작사/작곡/편곡 김태원, 보컬 김재기.

이 곡은 정식으로 녹음되지 않은 곡으로, 본 녹음에 앞서 가이드 형식으로 연습 삼아 단 한 번 불렀으나 직후 김재기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면서 어쩔 수 없이 해당 데모 트랙을 앨범에 수록하게 되었다.

 

김재기 사후 동생인 김재희가 보컬 자리를 이어받아 활동하였다. 이후 1994년에 SBS TV가요 20에서 7월 5주 1위, KBS 가요톱10에서 2주 연속으로 1위를 했고, 앨범도 120만 장 이상 팔리게 되어 1994년 앨범 판매 2위를 달성했다.

 

단 한 번의 라이브로 녹음된 데모 트랙이었음에도 높은 완성도를 가졌으며, 120만 장 이상의 판매액을 기록하여 부활 역대 최다 판매액을 가지는 음반이 되었다. 김태원은 녹음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그가 제대로 녹음하였다면 분명 세계적인 곡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데모트랙으로 저만한 경이로운 기록이 나온 것을 감안하면 과언이 아니다. 김태원은 라디오에서 언급하기를 이 곡은 녹음실에서 악보를 받아 즉석에서 부른 것이 아니고 정식 녹음 하기 전 매일 김재기와 만나 곡의 표현 방법을 의논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정을 반복하면서 곡의 완성도를 위해서 오랜시간 함께 교류하여 고행 끝에 나온 곡이라고 한 바 있다.

 

녹음 전 충분한 사전연습이 있었기에 녹음실에서 연습 삼아 단 한 번 부른 곡의 완성도가 그만큼 높을 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곡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별다른 기교 없이 담담하게 부르며, 후렴에 음이 올라가는 부분에서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부드럽게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음이 최고조에 달하는 클라이맥스까지 음을 내는 세기가 거의 일정하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이 곡이 가진 분위기와 감성이 김재기가 가진 음색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가 나오게 된다. 김태원의 보컬 최적화 작곡 능력과 레전드급 보컬이 만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노래.

 

다른 가수들이 부른 노래를 듣다가도 어느새 다시 원곡을 찾아서 듣게 되는 매력이 있다. 이는 대중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음악취향 Y이 선정한 발라드 베스트 100 중 이 '사랑할수록'이 16위로 선정되었다.

 

 

 

 

 

 

 

사랑할수록 /가사

한참 동안을 찾아가지 않은

저 언덕 너머 거리엔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 넌

서 있을 것 같아

 

내 기억보단 오래돼 버린 얘기지

널 보던 나의 그 모습

이제는 내가 널 피하려고 하나

언젠가의 너처럼

 

이제 너에게 난 아픔이란 걸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멀리 떠나가도록

스치듯 시간의 흐름 속에

 

내 기억보단 오래돼 버린 얘기지

널 보던 나의 그 모습

이제는 내가 널 피하려고 하나

언젠가의 너처럼

 

이제 너에게 난 아픔이란 걸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멀리 떠나가도록

스치듯 시간의 흐름 속에

 

이제 지나간 기억이라고

떠나며 말하던 너에게

 

시간이 흘러 지날수록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너에게 난 아픔이었다는 걸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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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테트라 - 구름과 나

 

 

 

블랙테트라 2기 멤버는 구창모(보컬), 김정선(리드기타), 박현우(세컨드기타), 김국현(베이스 기타), 임현순(드럼), 이계형(키보드) 이었다.   

 

1978년 제1회 해변가요제 예선은 TBC동양방송 라디오 부스에서 열렸다. 본선에 진출할 10여개 팀을 가리기 위해 라디오 부스에 드럼, 기타앰프, 키보드 등을 셋팅해 놓고 참가자들이 연주와 노래를 하면 심사위원인 TBC라디오 PD들이 당락 여부를 결정했다.

 

실력 미달인 그룹사운드는 보컬의 노래 한 소절만 듣고도 라디오PD들이 '그만하세요' 신호인 '뿌우~' 소리를 내는 부저버튼을 눌렀는데 이날 '뿌우~' 부저버튼을 누르지 않고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전곡(후렴포함 2절까지)을 들은 유일한 노래가 바로 ‘구름과 나’였다.


 ‘구름과 나’는 홍익대학교 그룹사운드 블랙 테트라 2기가 불렀는데 블랙 테트라의 ‘테트라(Tetra)’는 라틴어로 숫자4를 뜻하는 즉, 열대어의 검은 무늬가 4개여서 Black Tetra(검은 열대어)로 그룹명을 지었다고 한다.

 

죽을 때 열대어가 자기 몸이 부풀어 올려 터져 죽는 것처럼 강렬한 사운드를 표방했지만 그들이 선보인 음악은 하드록이기 보다는 통속적인 '기성가요'에 가까웠다.

 

 

블랙 테트라는 제1회 TBC 해변가요제 ‘연포해수욕장’ 가설무대에서 보컬 구창모의 부드러우면서도 샤우팅한 창법(노래 엄청 잘함)과 아마추어 대학생 연주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세련된 기타(기타 엄청 잘침) 테크니션의 김정선 연주는 다른 출연자(팀)보다 한수 위 높은 실력을 과시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연포해수욕장 피서객들은 누구나 블랙 테트라가 최우수상을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구름과 나’는 2위에 해당하는 우수상에 그치고 만다.

 

“블랙 테트라는 아마추어 학생밴드답지 않은 수준 높은 연주실력과 가창력이 되려 마이너스였다”는 그 당시 심사위원장의 말처럼 학생밴드 답지 않은 수준 높은 연주실력은 김정선의 기타를 지목한 것인데 사실 김정선은 홍익 대학생이 아니었다.


군 제대 후 단국대학 복학생 김정선은 의정부 미군 기지촌 클럽에서 기타세션을 할 정도로 프로페셔널한 기타리스트로, 김정선과 고등학교(배재고) 동창인 구창모가 가요제 입상을 위해 그를 홍익대 블랙 테트라 멤버로 끌어온 것이다.

 

MBC 대학가요제는 참가자들로부터 ‘재학증명서’를 요구했지만 민영방송사 TBC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 해변가요제 참가자(팀) 자격조건을 대학생뿐만 아니라 ‘고졸이상의 만 23세 미만의 남녀‘로 해놓고 어떤 증명서 요구도 없었다.


그 당시, 서울대 샌드페블즈, 고려대 코리아 스톤, 서강대 킨 젝스, 성균관대 정사품, 외국어대 외인부대, 홍대 블랙테트라 , 건국대 옥슨, 중대 블루 드래곤 등 대학생 스쿨밴드는 처음 결성부터 4명 ~ 5명이 합을 이뤄 연습을 한다.

 

그러다가 멤버 중에 누군가 군대를 가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밴드를 탈퇴하면 후임을 물색해서 그 자리에 들어온다. 그런데 단국대생 김정선은 어떻게 홍익대 그룹사운드 블랙 테트라 멤버가 될 수 있었던가?


블랙 테트라는 타 대학 그룹사운드와는 조직형태가 달랐다. 5인조 그룹사운드는 5명만 뽑고 4인조 그룹사운드는 4명의 정식 멤버를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는데 블랙 테트라는 그렇지 않았다.

 

홍익대학교 학도호국단 문예부 산하 보컬반으로 출발한 ‘음악 써클’ 블랙 테트라는 신입회원 모집 때,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기타를 전혀 못쳐도 회원으로 뽑았다.

 

그룹 사운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서클(동아리)형태였기 때문에 블랙 테트라의 기타, 드럼, 베이스, 키보드를 연주하는 사람은 각 1명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여러 명의 드러머, 기타리스트가 존재하는 블랙 테트라에 타 대학 기타리스트가 끼어 들어와도 기존 멤버들의 반발이 세지 못했다.

 

물론 거기에는 군대까지 갔다온 탁월한 노래실력을 갖춘 복학생 구창모의 카리스마가 작용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블랙 테트라 멤버가 된 김정선은 한마디로 동네 조기 축구 시합에 청소년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가 들어와 공을 찬 격이었다.

 

40여년 세월이 흘러 홍대 그룹사운드 블랙 테트라 공식 홈페이지를 보니 2기 멤버에 김정선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가 나당연합군으로 삼국을 통일한 기분일 듯 ~


‘구름과 나’는 밴드 음악이라기보다는 곡 진행이 물 흐르듯해서 합창에 어울리는데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사람은 고상록이라는 홍익대학교 1학년 학생이다.

 

 

1977년에 제1기 밴드가 만들어진 후, 2020년 현재까지 기수별로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홍익대 그룹사운드 '블랙 테트라', 그들은 4인조·5인조라는 그들만의 밴드가 아니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학우들에게도 참여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던, 그리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검열 속에서 제한된 노래가사 소재로 아마추어리즘을 뛰어넘고자 했던 '수준 높은 학생밴드'였다.

 

 

 

 

 

 

 

 

 

구름과 나 /가사

 

바람에 흩어지는 한 올의 실구름아

갈래갈래 내 나래는 토담골로 하늘거린다

 

바람에 일렁이는 철부지 먹구름아

설레이는 가슴 안고 동구 밖으로 뛰어간다

구름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

나는 달린다 하얀 고향으로

 

처음 외쳤던 그 곳 그 곳에

내가 있단다 젊음이여 구름이여

젊음이여 뜨거움이여~ 달려간다

 

구름아 너는 어데로 가느냐

나는 달린다 하얀 고향으로

 

처음외쳤던 그 곳 그 곳에

내가 있단다

 

젊음이여 구름이여

젊음이여 뜨거움이여~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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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들/ 바람과 구름

 

제 1회 해변 가요제(1978) 장려상 수상 작품이다. 이 곡도 여름이 가까워지면 생각나는 곡인데 제목부터 시원한 느낌과 자유로운 느낌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이 곡을 연주한 그룸은 "장남들"로 5개 대학 연합 팀이었다. 김창진(오르간, 홍익대), 박일병(드럼, 경희대), "김철(보컬, 단국대), 박상혁(기타, 인하대), 박영선(베이스 기타, 산구전문대)로 연포해수욕장에서 열린 동양방송 주최 가요제는 마치 그룹경연대회와 같은 분위기였다.

 

참가 팀 12 개 중 솔로는 단 두 명뿐이었으니까. 여름이라는 계절적인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고 당시 음악의 경향이 그룹사운드가 붐을 일으켜 캠퍼스 밴드가 우후죽순으로 발전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도입부의 일렉기타의 전주와 어쿠스틱한 사운드와 창법에 건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가사까지 1970, 80년대의 캠퍼스 밴드(학원 그룹사운드)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장남들은 1979년 김철 대신 "바람과 구름"을 작곡한 노수영이 보컬로 참여하고 기타에 박상혁 대신 오영섭이 가세하여 제1회 MBC 강변축제인 강변가요제에서 "여름바다"라는 곡으로 인기상을 수상하면서 인기를 이어간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멤버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면서 활동이 어려워졌으나 2000년에 1기 멤버를 주축으로 3기를 다시 구성해 활동한다.      ---첫발자욱님의 블로그에서 인용----

 

 

 

 

 

노수영 작사, 노수영 작곡, 노래 장남들 "바람과 구름"

 

 

 

 

 

장남들- 바람과 구름/가사

 

부는 바람아 너는 나의 힘

모든 슬픔을 거둬 가다오

광활한 대지에 끝없는 바다에

 

오호 바람이 분다

가는 구름아 너는 나의 꿈

높은 저곳에 데려가다오

푸른 창공으로 영원한 곳으로

오호 구름이 간다

 

나도 따라서~ 갈래 머나먼 저곳으로

나의 꿈을 따라서~ 멀리 머나먼 곳에~

 

부는 바람아 너는 나의 힘

가는 구름아 너는 나의 꿈

푸른 희망속에 끝없이 달리는

오호 바람과 구름

 

나도 따라서~ 갈래

머나먼 저곳으로

나의 꿈을 따라서~

멀리 머나먼 곳에~

 

부는 바람아 너는 나의 힘

가는 구름아 너는 나의 꿈

푸른 희망속에 우리 함께 달린다

오호 바람과 구름

오호 바람과 구름

오호 바람~과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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