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진암성지 (경기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관람일자/2022년 7월22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은 천주교 성지로 알려진 땅이름이다. 조선조 때 천진암(天眞庵)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 암자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기도를 올리고 천주교 관련 공부를 했다.
그 중에는 정약용 형제들도 있다. 스님들이 천주교인을 숨겨 주었다가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는 천주교의 성지가 되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은 조선시대에 지은 암자의 이름으로, 지금은 인근의 계곡과 산기슭 일대도 천진암이라 부르고 있다. 도로명 주소도 천진암로(天眞庵路)로 명명되었다.
사찰이름이 지명이 되고 천주교 성지로 변해
원래는 이곳에 천진암(天眞庵)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 절에 숨어들었다. 스님은 스스럼없이 젊은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때 이곳에서 천주교 교리를 익혔던 주인공은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와 권철신, 권일신 형제, 그리고 이승훈, 김원성, 이벽 등이었다.
이 당시 이벽을 제외하고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20대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도 강하게 끓어오르는 나이였다.
이들은 천진암에서 내어준 방에서 천주교 관련 강학과 기도수련을 하였다. 이벽은 20대의 청춘들에게 천주교의 원리를 강하게 전파하면서 모임을 이끌어 나갔다.
천주교에서는 7일을 기준으로 주일로 삼아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히 날짜를 잘 몰라 나름대로 기도 날짜를 정했다.
일주일을 단위로 하되 한 달을 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스무여드레로 나누었다. 그 날을 천주공경일로 전해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의 상황이 변기영 신부가 지은 노랫말에 나온다.노랫말에 당시 젊은이들이 어떻게 천주교를 전파해 갔는지가 잘 드러난다.
눈 속의 겨울 밤 촛불 아래 지새는데
선학(仙鶴)의 봄바람에 넋이 타던 어진 이들
빙천(氷泉)에 혼을 씻고 몸 꿇어 손 모으니
기도소리 들리네 천진암에서
찬미소리 울리네 천진암에서
선비들이 모이네 천진암으로
노랫말에 당시 젊은이들이 어떻게 천주교를 전파해 갔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렇게 시작된 천진암은 천주교의 성지가 되어 수만명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지역을 이르는 땅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 천진암 성지의 내력
천진암 성지는 전 세계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선교사 없이 성직자 없이 우리 겨레 스스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한 곳으로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한국 천주교 발상지이자 우리나라 천주교의 뿌리요 얼굴이며 우리 겨레의 정신이요 우리 국민의 정성이고 우리나라 종교와 우리민족 정신의 영원한 자랑입니다.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신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 15세부터 1784년 4월 까지 약 15년간 이곳 천진암에서 독서처를 정하시고 학업과 수도에 전념하시자 여기를 찾은 선비들이 선학도장을 이루었으니 당시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등은 10여세 아동시절부터 자주 찾아와 서양의 신문학을 배웠습니다.
--이상 천진암 성지 안내문에서--
앵자봉 밑의 천진암은 일찍이 이벽과 정약용이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어 창립성현 5위묘역이 조성되었다.